탈북자, 르완다 학살 … 함께 고민한 '젊은 유엔' [중앙일보] 2014.08.21.

유엔 문명연대 서머스쿨 가보니 한국인 2명 포함 70개국 75명 뽑혀 EF 뉴욕 캠퍼스서 일주일 합숙토론

탈북 어린이가 그린 북한의 모습 유엔 문명연대 서머스쿨에 참가한 한국외대부고 3학년 이하경양이 70여 개국 젊은이에게 보여준 탈북 아동의 그림. 먹을 게 부족해 나무껍질을 채취하는 북한 주민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이하경]

중국 베이징에서 고교를 졸업한 첸 샤오반(20)은 대학에 가지 않았다. 고교 시절 시작한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다. 2011년 그는 ‘TEC(10대들의 환경협의회·Teenage Environment Council)’라는 교내 환경보호 단체를 만들었다. 회원들이 지역별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안하면 교사·학생이 토론과 투표를 거쳐 프로젝트를 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지금까지 쓰레기 분리수거운동이나 환경 관련 도서 바자회 등 10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201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Rio+20 유엔 지속가능개발회의’에서 유망한 청년 조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중국 광저우 고교에도 같은 단체가 생겼다. 첸 샤오반은 “중국 곳곳으로 프로젝트를 확대시킨 다음 미국으로 유학 가 비정부기구(NGO) 운영 노하우를 익힌 뒤 중국에서 환경이나 교육 관련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6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뉴욕 외곽의 테리타운(Terry Town). 첸 샤오반을 비롯해 전 세계 70여 개 나라에서 온 젊은이 75명이 한적한 마을에 모였다. 유엔 산하기구인 UNAOC(유엔 문명연대·UN Alliance Of Civilizations)와 글로벌 영어교육기관 EF(Education First)가 ‘긍정적 변화를 위한 젊은이의 역할’이란 주제로 개최한 서머스쿨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주최 측은 전 세계 18~35세 젊은이를 대상으로 참가 신청을 받았다. 총 10만5000여 명이, 한국에선 2600명이 지원했다. 경쟁을 뚫은 이들은 일주일 동안 테리타운의 EF 뉴욕 캠퍼스에 머물며 기아와 인권, 난민, 종교 등 전 세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 대표로 참가한 한국외대부고 3학년 이하경(18)양은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 태평양을 건넜다. 지난해 이양은 북한에 대해 공부하고 탈북자 지원 프로젝트를 펴는 청소년단체 ‘하나(HANA·Hankuk Association of National Accordance)’를 만들었다. 미래의 리더가 될 청소년이 북한을 정확히 이해해야 나중에 북한 관련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고교생 회원들은 매달 북한 관련 기사나 논문을 공부하거나 전문가에게 강의를 듣는다. 18일 오후 7시 참가자들이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양은 탈북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을 모은 스크랩북을 전시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나무껍질을 벗기는 북한 주민의 모습이나 전기가 명절에만 공급되는 열악한 형편이 담긴 그림을 보고 외국 젊은이들은 “북한 사정에 대해 호기심만 있었는데 그림을 보니 실감이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양은 “대입으로 바쁠 시간이어서 손해를 볼 수도 있겠지만 같은 꿈을 가진 동료를 만나 기쁘다”며 “나중에 북한 관련 정책을 제대로 입안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참여자들은 대부분 인권운동가로 활동 중이거나 NGO를 만든 경험을 갖고 있었다. 명문대 졸업생부터 난민촌 출신까지 배경이 다양하지만 지향점은 같았다. 자신의 성공보다 서로가 함께 이해하며 어울리는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네팔에서 온 비카쉬 굽타(19)는 자신이 가르치는 9~10세 아이들 40여 명의 사진을 보여줬다. 고교 졸업반이던 지난해 그는 ‘Math Fest(수학 축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교육 여건이 열악한 시골 학생이나 홍수 피해자 자녀 등에게 무료로 수학을 가르쳤다. 그는 “어렸을 때 시민혁명으로 집 앞 경찰서가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는 등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교육 단절의 아픔을 알게 됐다”며 “수학은 전 세계에서 통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언어를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EF 뉴욕 캠퍼스에서 참가자들이 자신 이 해 온 NGO 활동 등에 대해 다른 참가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영토 분쟁 지역인 아프리카 사라하위의 난민촌에서 태어난 미네투 라라바스 수에다트(30·여)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도시에서 직장을 잡고 살 수 있었지만 난민촌을 택했다. 6년째 NGO 소속으로 지뢰 제거 활동을 해 온 그는 “난민촌에선 젊은 여성들이 의약품을 남용하다 병에 걸리는 등 기초 교육 부족으로 인한 폐해가 크다”며 “어린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육 캠페인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과 세미나를 거치면서 젊은이들은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소정(24·여)씨는 “지금은 질병이나 인권 등 어떤 문제라도 국제 공조가 긴요하다”며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더라도 시민운동이나 NGO 활동을 하면서 도움을 주고받기로 뜻을 모았다”고 전했다.

19일 저녁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들끼리 토론하는 자리가 있었다. 여기서 르완다 출신 크리스천 루상구아(19)는 “1994년 대량학살로 30만 명이 부모를 잃거나 남편을 잃었다”며 “이들이 정상을 회복하려면 정부 지원뿐 아니라 시민단체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브라질에서 지역운동을 하는 사마라 메스퀴타 타나카(32·여)는 “리우데자네이루 슬럼가에서도 매일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남의 일 같지 않다”며 해결책 모색에 머리를 맞댔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외무부 장관을 지낸 자아나브 하와 반구라(55·여) 유엔 분쟁지역 성폭력 특사는 특별 강연에서 “열정과 믿음을 갖고 청년들이 힘을 합치는 게 중요하다”며 “개인은 금방 녹는 눈송이지만 뭉치면 단단한 얼음이 된다”고 격려했다. 에바 코컴 EF 대표도 “청년들의 행동이 세상을 움직인다”며 “분쟁이 한창인 중동이나 빈곤층을 위한 교육사업, 시민운동 등에 힘써 달라”고 요청했다. UNAOC에 따르면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서머스쿨 참가자 중에선 유엔 프로젝트 참여자가 나왔고, 태국·에티오피아 등에서 실제 새로운 NGO가 생겨났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차세대 리더들의 소망은 꿈으로 그치지 않고 있다.

뉴욕=신진 기자

출처 :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4/08/21/15167495.html?cloc=olink|article|defau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