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과거 ''계집''의 운명을 걷고 있는 단어가 바로 ''보수''라는 단어다. ''계집''이라는 말은 원래 ''여자''를 의미하는 ''가치중립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단어는 의심할 여지없이 ''욕''이 되어버렸다. 따라 오는 수식어도 ''나쁜, 철딱서니 없는, 앙큼한, 버르장머리없는''등의 ''불순한'' 용어들뿐이다. ''왜 이렇게 보수적이야?''라는 말은 있어도 ''왜 이렇게 진보적이야?''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거나 거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보수'', ''진보''라는 말은 실은 ''내성적''이나, ''외향적''이라는 말처럼 어떤 ''성향''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사실 그것을 아우르는 특정한 맥락이 없이는 ''좋다'', ''나쁘다''라는 가치 판단이 유보되어 마땅한 말이다. ''보수''라는 말은 대체로 ''진보''를 주창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규정된 개념으로서, 정작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검증하는데 있어 상대적 ''게으름''마저 보인다. ‘타겟’으로서의 보수와 실제 보수의 실체는 다른 경우가 많은데도 자신들은 이를 그냥 용인하는 것 같다.

예컨대.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를 일컬어 ‘검정’이라 했을 때, 그것이 정말 검정인지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의문이다. ''보수주의자''라는 용어가 자신들의 실체와 상관없는, 진보주의자들에 의한 상대적 ''왜곡''이 아닌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보수주의''와 ''보수주의자''의 관계는 ''도둑질''과 ''도둑놈''의 논리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도둑은 ‘도둑질’이라는 행위적 실체가 있지만 보수주의자의 성향을 ‘보수질’로 본다면 진보주의자는‘진보질’을 하는 것인가?

더우기 오늘날의 보수는 진보주의의 상대적 발판이나 비난의 근거로 도용될 뿐, 어떤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허점은 오늘의 진보주의가 ‘합법적 파쇼’로까지 오인되는데 일조하고 있다. 왜냐면 ''진보''라는 말은 ''보수-보수주의''와는 달리, 단순히 어떤 ''성향''을 넘어 ''바람직한 결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진보-보수간 불공정한 담론의 현실이다. 보수는 ''성향''을 지칭하고, 진보는 ''성향''이요, ''바람직한 결과''라는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자연 ''당신은 진보적이야''라는 말과 ''당신은 보수적이야''라는 말의 상대적 지위는 이미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는 ‘진보주의’와 결부되면 모종의 긍정적 이미지를 얻지만 ‘보수주의자’는 ‘보수주의’와 결부되면 ‘보수주의자’라는 어처구니없는 비난에 직면한다. 이것은 소위 ''성향 비판''이다. 따라서 소위 언어적 편견을 제거하는 차원에서도 당초의 ''진보-보수''라는 틀을 재고해야 한다. 진보주의의 제물로 전락한 보수를 풀어줘야 한다. 진보주의를 위해 마땅히 죽었다가, 필요하면 다시 무덤에서 나와, 또다시 매장되는 오늘의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의 노예일 뿐이다.

우선 단순 진보 , 단순 보수라는 불공정한 도박판에서 보수주의자들 먼저 하루빨리 손을 털어야 한다. 진보에도 ‘좋은 진보’와 ‘나쁜 진보’가 있으며, 보수 역시 좋고 나쁨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진보로부터의 자유''는 여기서 시작된다. 어떤 의미에선 이것이 진보다. 살해당한 보수가 ''신원''되어 역사의 동반자로 서는 것 말이다.

교사 이경근
2003년 7월 31일 한겨레

주) 한겨레신문사에서 <진보로부터의 자유>라는 위 글을 <진보에서 벗어나기>로 수정하여 게재.